감사의 대상

0
0

COVID-19기간인 최근에 많은 이슈가 되고 있는 벼락부자 벼락거지 단어가 있는데요, 아파트 소유자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이렇게 부동산 가격이 오른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도 되나요?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받아서 감사하는 순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반대가 되서요.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을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받으면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복을 못받은 것으로 인식되는 문제와 비슷한 듯 합니다.

좋은 대학 간 것에 대해 감사헌금을 하거나 집값이 오른 것에 대해 감사헌금을 하는 것이 맞나요?

  • You must to post comments
0
0

감사라는 단어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항상 존재해 왔고, 모든 종교에도 ‘감사’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다만 그 감사라는 단어의 대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의 감사의 대상은 은혜와 은사 (선물) (복) 으로 구분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다양한 문헌을 통해서 얻은 은혜는 ‘구원’ 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것 같은데, 저는 그것을 ‘구원’ 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우리의 죄로 인해 죽어야하는 나를 구원해 주신 것. 따라서 이 은혜는 이 땅의 사람들 간의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 동일하게 주어진 것이고, 개인간의 차별이 없이 모두 동등하게 각 개인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면 나의 구원 으로 정의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은사는? 많은 문헌에서 얘기하는 은사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의 많고 적고의 차이. 건강하고 건강하지 않은 차이,  좋은 학벌과 그렇지 않은 차이 등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은사, 즉 복이라고 말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두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얘기하는 것은 교회 목사님이나 구성원이 아무 생각 없이 이 모두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설교해오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기도나 개인간의 대화에서 은혜라는 단어로 이 모든것을 포장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들을 모두 은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성도들간의 대화에서도 본인이 무엇인가 잘 된 것이 있을 때에 그 내용을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하면서 자랑할 것 다 하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은혜야~~~’ 라는 표현을 붙임으로서 내가 말하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 간증이기를 바라는 의도를 붙이기도 합니다. 결국은 자랑할만한 것이 ‘은사’ (선물), ‘복’ 이라고 말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한국의 복은 보통 수, 부, 귀, 강령, 다자손 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오래사는것 복(선물)입니다. 돈이 많은것 복입니다. 존경받는것 복(선물)입니다. 건강한 것 복(선물)입니다. 자손이 많은것 복(선물)입니다. 이러한 것은 개인들간의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어서 ‘은사’ (선물)라고 보는 것이 맞을것 같습니다.

정리하자면, 우리가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는 것을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한다면, 재산이 적은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이고, 큰 병으로 인해 죽거나 치료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사람이고, 대학에 안가거나, 인정해주지 않는 대학에 다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은혜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이고, 많고 적음의 차이가 없는 서로간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구원’. 이 구원은 사람들간의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조건 없이 각 개인에게 주는 것, 이 것이 은혜입니다.

 

다시 감사라는 단어로 돌아와서,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한국에서는 이 감사라는 단어의 대상이 결국 한 개인의 또는 한 가족의 종교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의 결정 과정은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순간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하다보면 크게 3가지 순간으로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첫 째는 큰 병이 걸렸다가 치료되는 순간. 두 번째로는 돈 문제. 세 번째로는 본인 또는 자녀의 대학 합격 순간으로 구분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이 문장에서의 제한적 의미로 미리 언급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로 처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사람들이라고 정하고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교회에 나갔거나 이러한 계기가 없이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아래의 예시가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 중에 불치병에 걸린 가족 구성원이 있는데, 이로 인해서 교회 나가고 기도 했더니 치료가 되었다면 그 가정의 종교는 매우 긴 기간 개신교를 믿는 가정이 되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그 병이 치료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점점 교회와 멀어질 수 있기도 합니다. 자녀의 대학 합격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 가서 빌었는데 합격했다면 그 집안의 종교는 개신교가 됩니다. 절에 가서 빌었는데 합격했다면, 그 집안의 종교는 불교가 됩니다. 이러한 과정으로 종교의 결정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웃프기도 하지만, 아직도 이러한 과정은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갖게 되는 과정으로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는 대입이라는 관문이 앞으로의 우리 삶의 순탄함과 연관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학 이름에 따라서 직장의 선택과 급여 수준,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을 너무나 오랫동안 봐왔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과정인듯 싶습니다. 다른 국가는 모르겠으나 미국의 경우에는 대학 진학률이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먹고 사는데 큰 문제가 없다고 대부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소득의 여부는 차이가 있겠지만, 큰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여담으로 미국의 고등학생들은 재수, 삼수라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많은 대학 중에서 어디든 들어가서 공부를 시작하고, 계속해서 다른 대학으로 옮겨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굳이 재수를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또한 미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노력을 높게 평가해주는 경향이 있고, 취업에서도 큰 차별이 없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더불어서 학교에서 학생의 합격/불합격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정원의 개념이 없습니다. 즉, 100명 뽑아야 하는데, 110 명을 뽑을 수 있는 재량이 입학사정관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입학 서류 평가는 서류가 들어오는대로 검증을 시작하여 합격/불합격을 결정합니다. 한국과 같이 지원기간 종료일까지 가만이 있다가 종료 후에 일제히 서류를 오픈하여 합격/불합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제출한 학생은 아직 지원기간이 종료되지 않았더라도 오픈하여 합격/불합격을 결정합니다. 물론 보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빨리 제출하는 것이 아무래도 좋겠죠.

이렇듯 같은 주제에 대해서 각 국가마다 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의 비중은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국가에서는 의사의 급여가 매우 낮아서 한 가족이 먹고 살기에도 부족한 수입이라고 합니다. 이 국가에서는 의대에 입학했다고 해서 우리와 같이 집안의 경사라고 보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조선시대 이전에는 과거급제하여 공무원이 되는 것이 의사가 되는 것보다 더 존경받았다는 시대가 있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도 그 가치의 비중이 시대별로 달라지는 것이 있어 왔습니다. 하물며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어떨지 매우 궁금하기는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역할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공부’라는 것이 공부하는 기간과 그 공부로 인해서 영향을 미치는 범위를 본다면 우리 삶의 60% 이상을 담당한다라고 본다면, 사교육이라는 주제가 가장 구체적인 예시가 될 것 같습니다. A라는 학생은 부모가 돈이 많아서 유치원때부터 매 달 300만원씩 들여서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과외를 시키고 했습니다. B라는 학생은 어려운 경제 형편으로 부모의 지원은 꿈도 못꾸고, 열심히 스스로 공부하였습니다.

이 두 학생이 모두 한국에서 가장 좋은 대학에 입학하였고, 이 때에 A의 부모도 하나님의 은혜(truly 선물)로 우리 자녀가 좋은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라고 말하고, B의 부모도 우리 자녀가 좋은 대학에 입학한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truly 선물)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화답해 줄까요? B의 부모의 감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아마도 A의 부모의 감사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너의 감사는 나보다는 학원비에게 감사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의 대답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하나님도 자신이 한 일을 다른 사람이나 존재에게 감사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하지 않은 것을 누군가가 와서 ‘감사합니다’ 하면 매우 당황할 것 같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다 너의 돈으로 하지 않았니?’ 할 수도 있겠지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말의 의미는 정말 어려운 개념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 명확하게 설명해주면 좋겠습니다.

 

 

 

  • You must to post comments
Showing 1 result
Your Answer

Please first to subm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