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성경에서는 아프면 장로들을 찾아가라고 했나요?
야고보서 5:14-16 KRV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Got Questions 에 따르면 야고보서는 편지이고, 그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로 여겨지는 야고보 또는 의인 야고보(마 13:55, 막 6:3)입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서의 저자는 A 또는 B 라고 되어 있습니다. 표현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동일인이라고 합니다. 왜 다르게 불렸는지는 모르지만 동일인이 맞다고 합니다. 전달의 표현을 쓰는 것은 제가 없었던 시간과 장소의 내용이므로 저도 듣거나 구글링을 통해서 얻은 정보라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는 주후 50년에 있던 첫 번째 예루살렘 공의회 이전인 주후 45년경에 쓰인 서신으로서 아마도 신약 성서 중 가장 오래된 책일 것입니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즉, 이 글이 쓰여진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병원, 의사, 의술, 치료 등의 개념은 현재의 개념과 매우 다르고, 아마도 이러한 용어가 대중들에게는 그 개념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50년을 생각해보면, 아래의 역사표로부터 주변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년 신라 남해 차차웅이 즉위
18년 고구려 대무신왕이 즉위
24년 신라 유리 이사금이 즉위
28년 백제 다루왕이 즉위
42년 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가야(금관가야)를 건국
44년 고구려 민중왕이 즉위
48년 고구려 모본왕이 즉위
53년 고구려 고구려 태조대왕이 즉위
57년 신라 탈해 이사금이 즉위
77년 백제 기루왕이 즉위
80년 신라 파사 이사금이 즉위
위 용어들 중에서 보면 ‘이사금’ 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사금이란 임금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사금이라는 표현은 당시에 이빨이 많은 사람을 의미했고, 이빨이 많다는 것은 오래 살면서 현자라는 의미를 내포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에는 치약, 칫솔이 없었기 때문에 이빨이 썩어서 빠져버리는 것이 허다하고, 이빨이 많이 남아있는 사람은 약간의 선택된 인물, 특별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여졌을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당시에는 이것이 병이라는 생각을 못했을것 같습니다. 동시대의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을것 같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제 생각으로는 아프다는 것은 어떤 죄에 대한 벌이나 귀신에 의한 증상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또한 장로의 의미는 현대의 교회가 사용하는 ‘장로’와는 다른 의미로 보는 것이 맞을것 같습니다. 기독교에는 장로가 있지요, 기독교가 생겨나기 이전의 카톨릭에서는 장로가 없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생겨난 것이 1세기라고 하더라도 카톨릭에는 ‘장로’라는 직분이 없었습니다. 그럼 AD50년에 장로란 누구일까요? 구약시대에는 부족의 지도자·촌로(村老), 회당의 장로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이들이 주로 지파나 대가족을 대표하는 역할이라고 합니다. 현재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장로’는 초대교회에 들어와서 사용되었던 것을 기록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야고보서의 ‘장로’는 부족의 어른, 작은 마을 단위에서의 대표, 나이가 많은 사람 등으로 해석할 수 있고, 아플 때에 이들을 찾아가라는 의미는 그래도 오래 산 사람이 질병과 관련하여 그에 맞는 약초나 민간요법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이고, 병원, 의원, 의사, 의술 등의 용어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고, 아마도 앞에서 말한 병이라는 것이 죄에 대한 벌이나 귀신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도 모른채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저의 어머니도 그랬지만, 아플때에 병원에 가지 않고 교회 가면 병이 낫는다는 것을 교회에서 배운것 같습니다. 당시의 목사님들은 역사 개념이 없이 성경에 있는 것이 무조건 진리이다라고 믿고 주일 예배에서 열심히 설교했을 것이고, 이 구절도 설교에서 아프면 저에게 오세요, 우리 교회 장로님을 찾아가세요, 했을 것입니다. 바로 성경의 ‘장로’를 현 교회의 ‘장로’직분으로 아무런 의심없이 믿었을 테니까요. 더 안타까운 것은 교회의 장로님들도 자기가 어떻게든 치료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올바른 장로인지에 대한 시험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아무런 의심 없이 성경에 ‘장로’를 찾아가라고 적혀 있으니까, 그 ‘장로’가 나이고, 목사님도 장로를 찾아가라고 설교시간에 얘기하니까 본인이 어떻게든 치료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안수기도 하고, 머리에 손 얹고 했을 것이고, 이렇게 해서 병이 호전되면 본인도 아마 강한 믿음이 생겨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이로인해, 결국 병원에 가야할 시간을 놓치고 더 병이 악화된 사람들도 많아졌을 수도 있습니다.
끝으로, 성경은 ‘진리’ 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문장입니다. 최근 성경에는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이 주황갈색으로 쓰여 있습니다. 이 말씀은 100% 진리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화자가 많이 있습니다. 글쓴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글쓴이들은 Witness 입니다. 증인이지요. 그리고 저를 포함한 현대의 기독교인들도 증인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이 기독교인이라면 증인입니다. 이 증인도 성경의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에 대한 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글쓴이도 예수님 이전의 사람도 있고, 예수님 이후의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이후의 사람들 중에 한 명입니다. 다만 우리가 지금 아무리 글을 써도 성경에 기록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지요. 즉, 성경의 글쓴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장이 ‘진리’는 아닙니다. 가장 비근한 예로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너의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구절은 많은 가정이나 사업체, 식당 등에 걸려 있습니다. 현재도 많이 걸려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욥의 친구가 한 말입니다. 욥의 상황에 대하여 욥이 이러한 고통에 있는 이유는 욥이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던 욥의 친구가 한 말입니다. 이 문장은 ‘진리’ 일까요?
아플 때에 우연히 교회 갔다 왔는데 나았다면 목사님이 능력있다고 믿습니다. 우연히 절에 갔다 왔는데, 병이 나았다면 불교가 능력있다고 믿습니다. 아프면 병원 가세요. 병원에 안가도 병에서 낫기도 합니다. 조금 시간이 걸릴 뿐이지요. 자녀의 대학 합격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 가서 빌었는데 합격했다면 그 집안의 종교는 교회가 됩니다. 절에 가서 빌었는데 합격했다면, 그 집안의 종교는 불교가 됩니다. 이러한 과정으로 종교의 결정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웃프기도 하지만, 아직도 이러한 과정은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갖게 되는 과정으로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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